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하르트 바그너 (문단 편집) == 여담 == * 반음계적 화성의 사용에서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코지마는 "남편은 모차르트를 '위대한 반음계주의자'(der große Chromatiker)라 여기며 존경했습니다"라고 증언하였으며 바그너 자신도 일생동안 모차르트의 수많은 작품을 접하고 연구하였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5px -10px" [youtube(93l5qV9kpUc, height=240)]}}}|| * 오페라의 대본 제작과 작곡을 같이 해낸 사람이다. 많은 오페라 작곡자들이 대본은 다른 사람이 쓴걸 사용한걸 보면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https://en.m.wikipedia.org/wiki/Category:Essays_by_Richard_Wagner|에세이 등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쓰는]] 등 글재주가 있는 사람. * 음악 자체가 정교하고 화려하며 스케일이 큰 편이라 현대의 많은 [[클래식(음악)|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바그너빠가 많은 편이다. 바그너빠를 [[바그네리안]]이라고 하는데, 사전에도 수록되어있다. * 그의 여성관은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는 어린 시절 수줍고 겁이 많았다. 또 응석을 받아주지 않으면 새침해지는 특징을 보였다. 이러한 성향은 그가 누이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던 환경 탓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그는 누이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어른이 되어서도 많은 여성으로부터 사랑 받길 원했다. 실제로 그가 여성들과 나눈 친교와 애정은 큰 누나에게 받았던 사랑과 막냇누이와 함께 했던 소꿉놀이의 연장인 셈이다. 바로 여기에 바그너의 여성 편력을 설명할 열쇠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제 나이 또래의 이성과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바그너는 이례적이었다. 그가 사귄 여성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나이 차가 많이 진다. 결혼도 한 번은 연상의 여자(사별로 헤어진 첫 부인 민나)와 했으며 또 한 번은 한참 어린 여자(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했다. 실은 딸이 있는 연상여와 결혼한 그의 심리적 배경은 큰누나 로잘리에로부터 받은 헌신적인 사랑에 동기를 두고 있다. 또 코지마를 부인으로 맞은 것은 어릴 때의 소꿉친구였던 막냇누이 체첼리에에 대한 기억 탓이 크다. 이들 두 누이는 그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여성들이었다. 즉 로잘리에는 민나를 비롯한 나이 많은 여성들의 원형이었고 체칠리에는 코지마를 비롯한 나이 어린 여성들의 원형이었다. 따라서 그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이상적인 여성상은 이들 누이이며 그가 사랑한 여성들은 큰 누나와 막냇누이의 그림자로 볼 수 있다. 바그너는 많은 여성과 연애를 했음에도 질투로 인한 원한을 사지 않았다. 여난이 없는 점 또한 통념에 어긋난다. 여난은커녕 그처럼 여복이 많았던 사람도 드물다. 어릴 때는 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결혼해선 부인의 인내로 많은 여성들과 바람을 피울 수 있었다. 민나는 남편의 사치와 도피생활로 인한 어려움을 잘 견뎌낸 조강지처였고 그가 코지마와 동거해 아이를 낳았을 때는 재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였다. 바그너는 자서전에 "여성은 인생의 음악이다" 라고 썼다. 그는 여성들과 사랑을 나눈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무한한 예술적 영감을 얻어 여성적인 것의 아름다움을 악극의 모티브로 연장시켰다. 그의 여주인공들은 그가 최상의 찬사로 묘사했듯 흰옷을 입은 정결한 금발미인으로 자태를 드러낸다. 그들은 젠타, 엘리자베스, 에바, 이졸데, 지글린데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되어 저주받은 남자, 어리석은 남자, 욕정에 눈 먼 남자를 구원한다. 바그너는 바람기가 있었음에도 그의 작품 세계에서 추구한 사랑은 순수한 것이었다. 이 점 역시 그의 여성관과 어긋난다. * 그의 정치관도 많은 모순이 있다. 젊은 시절 바그너 당시 급진적인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1849년 5월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혁명이 진압되자 당국은 그를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몰아 체포령을 내린다.[* 당시 드레스덴의 '민중의 소리'라는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모임 신문에서 <혁명>이라는 칼럼을 익멍으로 기고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을 없앤다.'''로 시작하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당시는 혁명과 소요의 시기로 사건은 불발로 끝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그는 〈로엔그린〉의 창작 중에도 뜨거운 가슴으로 혁명에 참가한 것이다. 이때 기미를 알고 재빨리 남편을 국외로 피신시킨 사람이 아내 민나로, 아마 그가 체포되었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는 더욱 아니다. 그는 부르주아 의식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니체와 틀어지기 시작한것도, 루트비히 2세의 후원으로 성대한 공연을 열어 여러 귀빈들과 함께하는 모습이 철저한 귀족같아서 니체가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이상주의자로 사회주의자들이 지향하는 평등과 박애의 이념에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학문과 예술은 자유주의 정신에서 활발히 피어나며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한다. 바그너 자신도 격식과 인습에 얽매이기를 싫어한 자유주의자였다. 그것은 그의 성품이나 예술적 기질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가 사회주의의 이상에 끌렸다곤 해도 그의 마음을 지배한 가치는 정치적으론 자유민주주의였으며 경제적으론 자본주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망명생활을 하게 된 동기는 정치신념 탓이라기보다 낭비벽이 가져온 빚 독촉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여권 정지 사유를 볼 수 있다. 혁명때문에 정지된것이 아니고, 과다한 채무때문이었다. * 그의 사치생활은 이름났다. 한 예로 그는 〈파르지팔〉을 작곡하는 동안 최고급 향수가 뿌려진 욕조에 자주 목욕을 하였다. 그러니까 정신의 희열을 악극에 담기 위해선 육신의 쾌감을 느껴야 했던 것인지, 또는 창작에 따르는 고통을 감각적인 편안함으로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둘 다였을 것이다. 정신과 육체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니까. * [[주세페 베르디]]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정작 성격이나 작곡 스타일은 평행선을 달린다. * [[아돌프 히틀러]]는 청년시절부터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숭모하는 열광적인 추종자였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이데올로기와 음악을 독일 국가를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는 영웅적인 신화와 결합코자 했다. >'''"독일은 바그너와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 [[아돌프 히틀러]] 바그너를 광적으로 존경한 히틀러는 바그너의 친필 악보 등을 가능한한 많이 수집하여서 자기만의 공간인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간수하였다. 바그너의 가족들은 히틀러에게 그곳에 두면 전쟁 중에 파손될수도 있으니 제발 바이로이트에서 보관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히틀러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내놓지 않았다. 결국 베를린 벙커의 바그너 친필 스코어들은 전쟁의 막바지에 폭격과 함께 재로 변했다. * 빅데이터 인문학의 저자들이 구글 엔그램 뷰어를 이용해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유명했던 사람을 선정했는데 바그너가 10위였다. 1위 [[아돌프 히틀러]], 2위 [[카를 마르크스]], 3위 [[지그문트 프로이트]], 4위 [[로널드 레이건]], 5위 [[이오시프 스탈린]], 6위 [[블라디미르 레닌]], 7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8위 [[찰스 디킨스]], 9위 [[베니토 무솔리니]] 순이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7063892|출처]]] * 오페라에 나오는 음악으로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자주 들을수 있는 음악은 바로 바그너의 '로엔그린'에 나오는 '신부의 합창'(Bridal Chorus)일 것이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에 연주되는 '딴 딴따단...'이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Here Comes the Bride'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곡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오페라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결혼식장에서 '로엔그린'에 나오는 음악을 듣게 된다. 그런데 이 곡은 실은 오페라에서 로엔그린과 엘자가 결혼의 예식을 마치고 신혼의 방으로 들어갈 때에 연주되는 곡이다. 그러므로 신부가 자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주례석으로 입장할 때 연주되는 음악은 아니다. 그래서 한때는 신부가 입장할 때에 연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여 그러지 말라는 캠페인도 있었으나 워낙 신부가 입장할 때 관례적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도무지 바로 잡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 그의 부인이 [[프란츠 리스트]]의 딸 코지마인데, 하필 결혼 전에 [[한스 폰 뷜로]]의 부인으로 있었다. 골때리는게 코지마는 바그너 빠순이, 뷜로는 바그너의 제자, 리스트는 바그너랑 친구뻘이자 은인. * 참고로 프랑스 화가인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의 팬이라고 한다. 당시 그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바그너를 만나 35분이라는 스케치 시간을 얻고 매우 기뻐한 뒤 초상화를 그려주었다고 하며, 그걸 본 바그너는 개신교 목사처럼 보인다는 평을 내렸다고 한다. * 팝송 [[You Spin Me Round (Like a Record)]]는 그의 곡 발키리의 기행에서 모티브를 얻은 곡이다. * 좀 우스갯소리로 [[13]]과 인연이 많은 음악가로 언급된다. 리하르트 바그너라는 이름이 13자이고, 태어난 해에인 [[1813년]]에 13이 들어가며 각 자릿수의 합도 13이다. 탄호이저를 완성한 날이 [[4월 13일]]이며 니벨룽의 반지는 1876년 [[8월 13일]] 처음 연주되었다. 그는 13개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그리고 죽은 날은 13일이었다는 것. 다만 이거 말고 상당히 억지도 들어가기에 다 믿은 걸 못 된다. 대중들 앞에 1831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숫자를 합치면 13이라느니 하는 것들. 80년대 금성출판사에선 낸 책자에선 엉뚱하게 바그너와 13을 다루면서 바그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언으로 난 13과 인연이 많지만 행복했다는 유언을 했다는 만화를 그린 바 있는데, 당연히 엉터리다. 참고로 바그너는 13일의 금요일에 죽지는 않았다. 1883년은 월요일로 시작하는 평년이므로 이 해의 2월 13일은 월요일이다. * 베토벤의 영향을 강하게 받긴 했지만 절대음악을 완성한 베토벤과는 달리 바그너가 작곡한 곡들의 종류는 [[오페라]]와 같은 극장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절대음악, 특히 교향곡 분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교향곡이 [[https://youtu.be/RJNNJTRD1GQ|있기는]] [[http://youtu.be/KgjbCqN0t70|하지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이전에 쓰인 워낙 초기작이라 바그너의 색채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그너가 교향곡을 썼다고 할 경우 가장 근접했다고 볼 수 있는건 [[안톤 브루크너]]지만, 이마저도 어느 시점을 지나면 브루크너만의 색을 띄게 된다. 참고로 교향곡 3번의 부제가 '바그너'.[* 교향곡 말고는 거의 안썼다고 봐도 좋을 정도인 말러의 경우, 바그너를 상당히 존경했지만 초기작부터 말기작까지 어느 것 하나 바그너의 색채가 크게 느껴지는 곡은 없다. 굳이 찾는다면 유동적인 선율과 부분부분에서의 화성 정도로 바그너가 개척한 음악세계를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 심화하는 데 성공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